2011년 8월 17일 수요일

(딴지일보 기사 복원)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추모] 김대중, 그리고 키스 데오도라키스


2010.08.19.목요일
문화불패 데니 크레인



8월 18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다. 워낙 많은 횽들이 글을 쓸거라 지레 짐작해 난 걍... 조용히 묻어갈까하다 의외(?)로 내 생각과는 쫌 다른듯하여 부득이 몇자 남겨봄둥.

김대중 전대통령에 대한 내 첫기억은 역시 울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편의상 이후 김대중으로 약칭).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울아버지는 김대중이 첨 대선에 나왔을때 십리길두 마다않구 연설을 보러 가셨다고 한다(당시 울집은 강원도에 살고있엇뜸.). 일테믄 요새식으로하믄 울아버진 정치인팬덤의효시쯤 되시것따(양준장의 초초..왕선배격이랄까 -.-;). 

그 뒤 내가 중학교때 김대중이 귀국하고 얼마뒤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그의 목소리가 첨 전파를 탔을 때 우리가족은 그의 라디오 연설(티비까지는 군부가 안풀어준겐지..)을 함께 들었다.



 
근데 사실 내 솔직한 첫인상은 부모님께 들어왔던 타고난 선동가나 연설의 귀재 이미지완 살짝 안맞었달까. 카랑카랑하며 쉰듯한 음색에 왠지 어눌한듯한 언변..어? 이 사람이 그 김대중 맞어?? 이게 솔직한 내 첫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시 김대중은 대선(87)에 나오고 드디어....드디어....광주에 오게된다. 당시 광주분위기는 머랄까 요한바오로 2세가 방문했을때의 한 열배쯤이라 상상하믄 얼추 맞을끼다. 적어도 당시엔 김대중은 광주에겐...광주시민에겐...피내음이 가시지 않은 도청 주변 금남로 1가 앞을 고개를 떨군 채 걸으며 숨죽인 7년 세월을 소리없이 흐느끼며 크게 한번 울어보지도 못한 그 세월을... 견뎌내야했던 광주...광주시민에겐 메시아의 현신(?)과 다름없을 정도의 존재였다. 과장이 아니다.

감이 잘 안올 다른 지역분들을 위해 군대에서 겪은 소소한 에피소드하나 더한다. 김대중이 당시 호남민중에게 어떤 존재였는지...이 에피를 보고 가늠해보시라 내 군대 차차기수 즉 밑에밑에 쫄따구가 있었는디 이 짜슥이 바로 김대중의 고향 신안 인근 어느 섬 출신이다. 어느 정도로 촌놈인고 허니 군대 입대하려고 뭍(육지)을 20살 넘어서 첨 밟아봤다는 오리지날 깡촌놈이다. 그놈 바로 밑에 쫄따구는 더 한다. 지리산 산골 출신인데 티비가 KBS1밖에 전파가 안잡혀서 그것만 보고 20년을 살다 군대온놈이다. 대충 감들 오시나?

87년 당시 쫄따구가 살던 섬에서 있던 일이다.

택트가 자빠져도 오봉은 달려가듯 아무리 깡촌 섬일지라도 꼭 있는게 두가지다. 바로 다방과 교회...워워~교회 까려는거 아니니 7월횽은 캄 다운~ 암튼 섬에 있던 교회를 쫄따구는 다닌게다. 그런데 87년 대선 직후 주일날(일요일) 예배중 간증시간에 한 동네 아줌씨가 나오셔서 하시는 말씀.


"하나님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제가 선생님이 2번인디 잘못해서 1번을 찍어부렀네요 하나님 아부지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흑흑..."


이 이야기가 웃기다면 당신은 정신승리과 이고 개념 탑재한 횽들이면 이 에피소드 속에 깃든 호남민중의 피눈물 나는 한의 변주가 들려주는 페이소스를 느꼈으리라 본다.

그런 시대와 그런 시절이 결코 우습지만은 않은 세월을 호남 민중은 겪어왔다. 김대중을 찍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설사 빨갱이 북한 공산당과 도매급으로 취급당할지라도 그것만이 합법적인 정치적 결사표현의 전부였기에 주저함 없이 2번을 찍고, 그리고도 돌아서서 주위를 살피며 혹시 들킬까 맘을 졸여야했던 그 시대... 그렇다. 호남민중과 함께하는 당대 2번(87년엔 3번인적도)을 기표했던 분들이 그 투표용지에 찍은 것은 단순한 인주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호남민중의 한과 피눈물로 오롯이 짜낸 진정 피로써 찍어낸 한표 한표였던 게다. 이 글을 읽는 횽들 중 단 한번이라도 *번을 찍은게 보일까 들킬까 시퍼 가슴 졸이며 투표소를 나서본 적이 있는가? 목숨 걸고까진 아니더라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이익을 감수하며 찍어야 했던 그 떨리는 손끝.....그런 비슷한 기분을 21세기에 들어선 요근래 다시 느낄 줄이야.

민주당에 대한 호남민중의 애증은 이 역사를 깊이 그리고 가슴으로 들여다보지 않곤 절대 이해할 수도 그리고 정치지형자체를 변화시킬 수도 없다. 단지 박근혜가 부모를 잃어서 짠하다는 그네들의 정서가 우리네 인정을 기반한 것이라 손가락질 할 순 없다 치더라도 적어도 호남민중의 이 절절하고 피맺힌 40년에 걸친 김대중과 5.18이라는 역사적 이름이 어찌 감히 동등한 무게로 취급받을 수가 있단말인가. 박정희와 그 주구들이 저지른 추악한 배제와 압살의 역사는 반드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어야 한다. 아니 그리되도록 우리가 기필코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어느덧 세월이 흘러 세상에나...영원히 선생님으로 끝날 것 같던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다. 재임 기간 내의 이러저러한 디테일한 이야기는 오늘만큼은 과감히 제끼겠다. 1주기니까...이거슨 그냥 나의 철저히 개인적 경험에 관한 이야기라 봐도 좋다.

김영삼정권과 박치기함서 싸우다 어느덧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고 국민의 정부가 되었을 때 그때를 복기해보면 광주를 위시한 호남의 분위기는 김대중을 우리가 안 밀어주믄 누가 밀어주나. 머 좀 다른 데서 불평하는 소리가 나도 우리라두 가만 있자 그게 도우는거다 머 이런 분위기였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김대중 재임말기 처참하게 갈기발기 찢겨질 때 그때서야 사람들은 알았다. 아! 그때 우리가 그건 좀 문제있는 거 아니냐고 목소리냄서 바른소리 듣기 싫어도 쓴소리 내주는게 차라리 대통령을 진정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김대중 자신은 노구에도 그 누구보다 정력적으로 일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지만 주변이 무너지며 그 자신이 이룩한 빛나는 업적마저도 오늘날엔 위협받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친노횽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든다 노무현 인간 개인에 대한 재평가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냉정을 찾고 참여정부의 공과를 분석하고 두 대통령과 정부내에 이루지못했던 미완의 부분 즉, 개혁의 실패원인과 개선할점에 대한 정말 뼈를 깎는 자기정정과 자성을 통한 넘어섬의 정치를 모색하고 비젼을 제시할 때가 아닌가 한다.

반MB만으로? 글쎄..난 그 결혼은 결사 반댈세.
이를 불편하다고 친노횽들이 회피하거나 무한쉴드신공 작렬함서 이거나 저거나 다 카바 치거나 우리가 멀 잘못했다고~내지는 이게다 조중동때문이다 일케 나오믄 이건 진짜 그 횽들이나 우리 모두 답 없는기다.

왜냐믄 우리가 먼저 안나서면 저새끼들이 온갖 색을 칠함서 또 어떡케 난도질할지 뻔하지 않는가.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추모에 대한 글을 쓰러 들왔다가 혼자 주절주절만 한거같아 살짝 민망하다.

그래서 예전에 정치불패에 올렸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글을 다시 함 올려본다. 생각해보니 그 글은 이곳 문불이 어울릴만한 글이었는데 당시엔 정불에서만 노느라...

1주기를 맞이하여 진정 '정신을 계승한다' - 이런 말 우리 참 쉽게 쓰곤 하는데 그 의미를 다시금 곰곰히 되짚어보는 하루였음 하고 작게나마 바래본다.


(이하 글은 살짝 손봐서 재탕해봄  글타구 나 코렁탕 먹이지마삼 쿨럭~)



"진실은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
-키스 데오도라키스-
  




그리스는 우리와 비슷하게 외세에 의한 통치(터키의 지배를 받았지요)를 받은 역사가 있습니다. 또한 2차대전의 포화를 빗겨 나가진 못하죠. 독일점령시 데오도라키스는 레지스탕스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2차대전이후 외세와 손잡은 보수파가 왕정제를 부활시키고 국민들을 억압하자 60년대 그리스전역에 평화시위가 일어나는데 참석했던 좌파민주주의당의원인 람브라키스가 백색테러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우리나라는 김구선생 암살, 여운형선생 암살, 암살과 다름없는 조봉암선생 사형, 장준하선생 의문사 등 셀수가 없지요.).

그때 상황을 영화로 만든것이 그 유명한 'Z'란 영화이고 이영화에서 영화음악을 키스 데오도라키스가 맡습니다. Z는 고대 그리스어로 '그는 살아있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람브라키스의 죽음이후 데오도라키스는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합니다. 그는 '람브라키스 청년동맹'을 결성하고 적극적인 민주화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그 성과로 람브라키스의 사인을 규명하고 관련자들을 법적 심판하며 아주 잠깐의 봄을 맞습니다(우리나라의 4.19나 서울의 봄을 연상케 하지요.).

그러나 곧바로 군사쿠테타를 맞이합니다(시바스런 전대가리가 문득 떠오르는군요 퉤~). 쿠테타 이후 데오도라키스를 포함한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 되어 감옥으로 보내집니다(5.18 광주민중항쟁이..ㅜㅜ). 그러면서 데오도라키스의 모든 음악이 연주되거나 방송되거나 판매하는 것이 금지됩니다.

에피소드 하나는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을 부르는 것도 금지되던 그 시절 그것을 단속해야할 경찰이 데오도라키스의 음악을 흥얼거리다 구속되는 웃지못할 일도...(과거에 우리나라도 금지곡 무쟈게 많았죠 모 여가수가 손을 하늘로 찌르는 춤을 춘것이 북한으로 보내는 수신호라며 방송을 금지시켰던 역시 웃기 힘든 과거가 있었지요.)

데오도라키스는 자투나섬에 유배와 오로포스 군집단수용소를 떠돌게 되는데 이시기 좌절치 않고 더욱 음악창작에 열중했다고 하네요(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떠오르네요.). 이 시절에 그의 음악은 그리스 민중들 속으로 더욱 빠르게 파고들어갔고 국제적으로도 유명 인사가 되게 됩니다. 결국 국제여론의 지탄에 그리스 군정은 데오도라키스를 국외 추방하게 됩니다(역시 고 김대중 대통령과 또 유사하지요.).

추방이후 데오도라키스는 1천회가 넘는 유랑공연을 통해 조국 그리스의 처한 현실을 세계에 알리며 그리스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됩니다. 그를 구심점으로 해외에 그리스 민주화세력이 모이게 됩니다(이런 또 김대중대통령과 겹쳐지네요.).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로 전세계에 알려집니다. 그리고 드디어 74년 그리스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그는 고국으로 금의환향하게됩니다. 그후 수차례 국회의원과 장관을 거치며 왕성한 정치활동을 한 그는 93년 공직에서 물러난후 작곡과 지휘에 전념하면서 국제평화와 인권운동에 많은 활동을 하고있습니다. 97년 그리스와 터키의 영토분쟁으로 전운이 감돌때는 터키의 유명 아티스트 줄푸 라파넬리와 함게 평화지대인 니코시아 사이프러스에서 평화를 위한 공동음악회를 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과거 부시정부의 이라크전쟁을 강력히 규탄하였으며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00년 노벨 평화상후보자로 지명되기도 했는데(당시 수상자가 고 김대중 대통령이니 이거 참 인연이 묘하게 깊지요.) 당시 국내 일부 수구꼴통들과 악질언론들의 악랄한 왜곡이 판을 쳤지만 기실 다른 후보자들은 몰라도 키스 데오도라키스 정도 되는 후보와 경쟁해 밀레니엄의 첫수상자가 된것은 적어도 저로선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군요.

머 적어도 오바마처럼 얼떨결에 받는 그런 시추에이션은 아니란 거지라. 갠적으로야 노벨상 자체에 너무 목 매는 한국 풍토가 그닥 썩 맘에 들진 않치만 그래도 고 김대중 대통령이 오랜 세월 한국을 넘어 아시아 평화와 인권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만큼 노벨상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충분히 받을만한 업적이 있었다 봅니다.

이때 당시 그리스의 국내외 저명인사 천여명과 총리까지 나서서 전국가적으로 데오도라키스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청원하며 그야말로 국가적인 지원(?)를 했었는데 거기에 대면 고 김대중 대통령은 상을 받고도 찌라시들의 악랄한 폄훼에 시달렸으니... 에휴~

데니가 이 냥반을 첨 알게된건 KBS에서 했던 어떤 방송에서였는데 은발의 왠 거구의 할아버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실제 그는 작곡가이자 유명한 가수이기도합니다.) 그리스 레지스탕스가 'THE BELLS'를 부르는데 오호..포~쓰 작렬이었지요. 그뒤에 관심 갖고 찾아보니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이 노래는 무신 울나라 드라마에서 주제곡이었다는데 난 잘 몰겠고 혹 아시는 횽은 밑에 댓글로 좀 알려주시구랴.)

암튼 여러 가수가 불렀구 조수미가 부른 것도 들었으나 데니의 강력추천은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버전입니다. 근데 원래 데오도라키스가 쓴 배경은 내전 당시 빨치산이었던 친구와 정부군이었던 친구가 전사했던 개인적인 아픈 과거를 바탕으로 쓴 것이지라. 또한 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희랍인 조르바(조르바 댄스 등..)>, 멜리나 메르쿠리가 주연한 < FONT>(죽어도 좋아)>, , 코스타 가브라스가 감독하고 이브 몽땅이 주연한 , <계엄령> 등의 영화음악으로 유명하지요.

그외에도 1000여곡이 넘는 민중가곡과 교향곡 7곡 2곡의 발레곡, 2곡의 대작 오라토리오와 오페라 4곡 등을 쓰셨지라. 제가 추천할 곡으론 요새 무기력하거나 하신 분은 'THE BELLS'를, 좀 차분히 명상을 하고픈 분은 'MAGIC NIGHT'를, 사회에 불만이 많으신 분은 '그가 법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를, 비오는 날엔 역쉬~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불면증으로 고생하시는 분은 'LOS LIBERTADORES'를(이 곡은 역시 노벨상 수상자인 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 데오도라키스가 곡을 붙인것인데 망명시기에 만났다죠. 후에 정당한 선거를 통해 집권한 칠레의 아옌데 정권... 미국의사주와 지원을 받은 반군과 연합한 군부쿠테타에 의해 아엔데대통령이 대통령궁에서 탱크와 전투기의 폭격을 받아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이후 그의 평생 동지 네루다또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칠레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던 네루다와 데오도라키스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데오도라키스는 네루다의 사망 이후 그를 위한 '레퀴엠'을 작곡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곡이 한 15분정도 되는데 듣다 지쳐 잠이 드실수있으실듯...ㅎㅎ) 살포시 추천합니다.

제 생각엔 이 분과 비견될만한 분으로  윤이상 선생이 계시지 않나 싶습니다만... 음악적 성취와 민주화 이력이랄까요, 두분 다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고초를 겪으셨으니까요. 분단조국에서 한쪽에선 빨갱이의 멍에를 써야 했던 그의 고독과 번민이... 같은 군사정권하에 신음하고 있는 그리스의 민중들을 생각하며 망명지에서 음악활동을 해야 했던 데오도라키스가 처한 상황과 음악적 성취에 견줘봤을 때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느껴서입니다.

한 분은 ,위에 언급한 에서 주연으로 연기한 정치적 동지이자 경쟁자였던 멜리나 메르쿠리의 표현을 빌자면


"그리스에서 그의 음악을 듣지 않고 지나는 날은 하루도 없다. 라디오든 극장이든 술집이든 열려있는 창가에서 지나가는 소년이 부는 휘파람 소리든 어디에서든지 들려왔다. 그의 음악은 일상생활의 전부였다"


라고 할 정도로 폭 넓게 사랑받고 있는 반면 우리에게 윤이상 선생의 경우는 살아생전에 박정희정권이 그분을 납치해서 빨갱이로 몰아 사형시키려했다는... (여기에는 윤이상 선생님의 방북이 원인인데 생전의 인터뷰에서 윤이상선 생님은 고구려 강서고분의 '사신도'를 보기 위해 방북하셨다 합니다. 그 후 영감을 얻어 옥중에서 작곡하신 것이 '이마주' 란 작품입니다. 그 분의 '사신도'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여 집에 사진을 걸어두고 작품을 쓸때를 비롯,  언제나 '사신도' 를 바라보셨다 합니다.)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그토록 보고 싶어했다던 고향 통영의 바닷가를 다시 보시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돌아가시고... 아직까지 제대로 된 평가조차 받지 못한 현실이 떠올라서글퍼지네요 ㅠㅠ(작년 이 맘때 신문 기사중에 윤이상선생 흉상이 창고에 쳐박혀 방치되있단 기사를 본 기억이 나네요.)


"짐승도 죽을때 제집으로 돌아가는데 하물며 인간인데... 내 조상이 살았고 우리에게 물려준 땅에 묻이는것이 소망입니다 나의 모국 땅에서 여생을 보내는것이 나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윤이상


이분들이 각자 자유와 인권 평화를 위한 험난한 노정에서 일생을 다해 헌신하셨음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키스 데오도라키스가 말한 <진실은 우리를 행동하게한다>란 말과 김대중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이 소름 돋도록 겹치어지며 다가오는 오늘날. 역시 시대의 풍랑을 이겨냈던 위대한 이들은 한결같이 입술로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이 아닌 실천의 중요함을 강조하신 것 같습니다. 두 분 연배가 비슷한데 데오도라키스는 살아계신 반면 김대중대통령과 윤이상 선생은우리 곁에 없음이 문득 서글퍼지기도 하는군요.

갠적으로 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높게 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는 '유머감각'을 탑재한 정치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람 좋은 옆집아재 같은 털털한 탁배기 한사발 같은 정치인 이었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시골마을 큰나무 평상아래서 손주뻘 아이들 무릎에 앉쳐두고 풍성한 이야기 보따리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마을에 울리퍼지게 해주시는 할아버지같은 분이었달까...

그의 어떤 정치적 발언이나 연설보다 내 기억속에 인상적으로 자리잡은 모습은,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정말 펑펑 울 줄 알고 또 어린아이처럼 웃을줄 아는 몇 안되는 어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여리고 섬세한 마음으로 시대의 풍파를 겪으며 자신을 온전히 강철로 단련하며 평생을 스스로 채근하며 살았을 인간 김대중에 오늘... 연민과 존중을 동시에 느끼며 이 노래를 바칩니다. 제목이 왠지 그의 삶을 웅변해주는듯 해서 골라봤습니다.


 Dioti Den Sinemorfothi
(그가 법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푸른 물결과 수평선 위로
몇 년간 보지 못한 어머니를 기다린다.
내가 법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가시 철망 담 사이로 여러 해가 오고 갔다.
당신을 보지 못한 채, 쓸쓸한 날들만 헤아린다.
내가 법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할리카르나소스, 파르테니, 오로포스, 코리달로스
당당한 젊은이는 자유의 불빛을 기다린다.
그가 법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음악은 일부러 뺐습니다. 노래는 한 곡만 트는 게 분위기상 나은듯 혀서 대신 가사만 올립니다. 마지막으로 한때 제 컴터  바탕화면을 차지했던, 몇해 전 한 소년이 경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한 사건으로 촉발되었던 대규모 그리스시위 당시 사진 한장을 남기며 갈무리할까 합니다.




횽들도 현실이 이처럼 바록 희뿌옇더라도 힘차게 미래를 향해 달려나가시길...

근데 왜 난 이 사진을 볼때마다 나루토에 나오는 닌자가 생각나는걸까???
요새 돌아가는 꼬라지 보믄 다시 일케 거리에 서야 하는거 아닌가 몰것어. 불행한 예감은 유난히 잘 맞는다는데... 왜 난 유난히 피내음이 나는걸까 이 정권하에서 다시 다시다맛(최루탄 내음을 선배들은 음~바로 이맛이야 고향의 맛...일케 표현했었지라)을 볼것같은 예감이 자꾸 드네 헐~

오늘... 양심의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건다.


'불복종' 하라고.........


 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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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서거 1주기때 딴지에 쓴 글인데...내 후진 필력으론 이보다 더 잘쓰긴 힘들고(머 글타고 잘썼다는건 아니고 쿨럭~)시간도 벌써 새벽 1시라...먼가 낼 다시 하나 쓸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어차피 딴지기사 복구하는 셈 치고 마침 낼 아니지 이제 새벽이니 오늘 18일이 서거 2주기고 허니 그냥 올려본다눈...재탕 한다고 돌 던지진 마삼 후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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